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어느 소설가가 정의한 청춘입니다. 화려하지만 돌아서면 불안한 것. 기쁘지만 어딘가 쓸쓸한 것. 가득찬 것 같지만 어느 한구석 뻥뚫려 있어서 채워도 채워도 허전한 상태. 밑 빠진 독같은 것. 그런 게 청춘이지요. 우주의 법칙을 정리한 물리학자도 열 길 사람의 청춘은 정리하지 못합니다. 수치화 할 수도,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붙일 수 없는 것. 청춘은 가깝고 또 아득합니다.
마음이 가득하면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늙음이라는 게 그런거 아닐까요. 세월에 뭔가 빼앗기는 것 같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꾸만 채우려는 조급함. 작은 것 하나도 버리기 싫어서 잡고 늘어지는 욕심과 아집. 하지만 늙음을 나이로 가늠할 수는 없지요. 나이 많은 청춘이 얼마든지 많으니까요. 시시한 애늙은이도 많듯이. 청춘은 마음입니다. 청량하고 새로운 마음. 왕성한 호기심과 불같은 질투까지. 그래서 청춘은 사랑입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사랑. 손익을 따지지 않는 우직한 것. 청춘의 드라마는 쓸쓸하고 우울합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서사. 하지만 손해를 계산하지 않아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하는 투명한 슬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사랑이란 단어가 싫었습니다. 우선 손가락이 오글거리고 얼굴이 벌게집니다. 또 광고 카피에서 사랑이란 말은 술자리의 옛이야기같이 촌스러워, 써야 할 곳에 쓰지 못하고 주저한 적이 많았습니다. 어째서 나는 사랑을 비웃고 조롱하는 법만 배웠을까. 어른인 척 하는 데만 능숙했던 애늙은이가 되었을까. 나는 청춘의 사랑을 못해봤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들킬까 봐, 손해볼까 봐, 단단히 마음을 잠구었던 녹슨 자물쇠같이 추레한 내 청춘. 이건 정말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나는 시를 쓰거나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예술같은 건 못 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못 해봤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에게도 맹목적이고 뜨거웠던 게 있었는데, 광고였습니다. 광고가 뭔지도 모르고 이 세계에 들어온 나로서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퇴근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던 직업. 떠오르는 아침해를 함께 바라보던 청소아주머님이 ‘나는 2년이 지나도 니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던 불가해한 직업. 형체가 없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이 희한한 직업을 나는 사랑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에 라디오, 인쇄 카피 스무 개 정도는 기본으로 썼던 시절. 스무 개 쓰면 스물 한 번 깨지던 시절. 그러다 하나 팔리면 온 몸에 힘이 들어갔던 시절. 내가 쓴 카피에 모두가 달라붙어 그림을 붙여주고, 콘티가 되고, 촬영을 하고...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했던 시절. ‘테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이 아니라 ‘내가 만든 광고가 나왔으면’ 했던 시절. 내가 맡은 제품과 비슷한 카테고리의 신문광고들은 모조리 스크랩했던 시절. 가끔은 남의 카피가 너무 마음에 들어 슬쩍슬쩍 베껴쓰기도 했던 시절. 잘 만든 남의 광고를 보면 몇 일 동안 밥맛이 없던 시절(내인생의 뱃살이 만들어지던 시기라, 밥맛이 없었다는 건 정말 심각한 일이었죠). 광고 한 편 잘 만드는 게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시절. 그래서 허세도 건방도 있었던 시절.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걸 사랑이 아니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야말로 좌충우돌, 동충서돌. 부딪고 돌진하며 내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부딪혀 생긴 상처들은 경험이 되어 나를 성장시켰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돌아보니 후배가 생겼고, 팀이 생겼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돌진하고 부딪히는 후배들을 막아서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선은 지키라고, 이 선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 밖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지금의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까요. 맞춰가는 것, 다수가 좋아하는 것, 논란이 적은 것, 그런 사랑받는 법들만 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요즘 광고에 청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옳고, 바르고, 화려하고, 트랜디하고, 전략적이고, 성공지향적이고,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이야기들. 그런 가득찬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뭔가 2% 부족한, 그저 한마디 쓰윽~ 던지는, 가슴 한쪽에 찬바람 불어오는 그런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이야기들이 그리워집니다. 광고가 변했다고 합니다. 미디어 환경이 변했다고 합니다. 크리에이티브도 변한 걸까요? 우리는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이 달라진 사람에게 변했다고 하지요. 크리에이티브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면서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사랑할 때 가장 인간적입니다. 사랑할 때 가장 크리에이티브합니다. 바보가 되길 두려워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생각의 다름을 용감하게 내던지는 청춘의 아이디어. 그런 크리에이티브를 보고 싶습니다.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청춘일 수 있을까요? 나는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하늘은 늘 청춘입니다. 매번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는 저 푸른 바다도 청춘입니다.
나무도 해마다 청춘을 반복합니다. 나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잎이 떨어질 때라고 합니다.
떨어져야 새로워진다는 걸 아니까요. 미련도 핑계도 없이 낙하하는 용기. 그런 멋.
그게 청춘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비결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