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치의 미학
“아는 것은 슬픈 것이 나니”
학생 때 읽었던 바이런 時의 한 구절. 왜 바이런은 아는 것을 슬픈 것이라고 했을까? 그는 이어 “인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상하다. 안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닌가? 더 많이 알아야 더 뽐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아는 것이 생명의 나무가 아닐까?
마음속의 의문을 갖고 적어 놓았던 그 한 구절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은 광고회사 생활 십 년을 훌쩍 넘고 나서였다. 흔히 말하는 초심자의 행운으로 어떤 프로젝트, 어떤 문제점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넘치던 시절. 하지만 그 모든 자신감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직접적인 비교의 오류는 있지만 과학자들은 이 우주를 채우고 있는 물질 중 68%는 암흑물질, 그리고 27%는 암흑에너지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물질인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 밝혀낸 이 세상 물질의 정체는 단지 5%. 우리가 하루하루 숨 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이 우주를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은 사실 95%의 알 수 없는 것들이라니... 뭔가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우린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은 상대를 때로는 강하게 가르치려 들고, 때로는 은근히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사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믿고 있는 <자신만의 진리>라는 것은 단지 이 세상 알려진 5% 안에서만 작동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모르는 무지의 영역 95%를 인정해야 하고, 그 영역 안에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또 다른 퍼스펙티브가 있음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는 무엇을 빼고는 하나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혹시 더 현명한 것은 아닐까?
“확신은 가장 무서운 편견이다”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는 ‘질량을 가진 물체는 서로 잡아당긴다’는 뉴턴의 진리로 깨졌고, 그 뉴턴의 위대한 진리마저 현대물리학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에 의해 ‘질량을 가진 물체는 공간을 왜곡시킨다’는
일반 상대성원리로 인해 정정되고 말았다. 그렇다. 우리가 그토록 믿고, 틀림없는 확신이라는 것이 어느 시점에서는 단지 강한 편견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확신이 반대편에서 바라볼 때 어떤 오류가 있을지 충분히 검증해야 하고, 내가 주장하고 있는 주장이 완벽하지 않음을 미리 인정하고 조심히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생겼다. 바로 모르면 용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알수록 소심해진다는 또 다른 사실 때문.
“더닝 크루거 효과”
1999년 코넬대학교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는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과 ‘지식이 갖는 소심함’을 이론으로 발전시켜 이해하기 쉬운 그래프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다시 찾아가는 자신감이 최초 무지 상태의 자신감인 100%를 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동안의 시간과 노력을 다해도 그 결과치가 최초의 자신감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뭔가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최초의 자신감을 찾아가기 위해 묵묵히 전진하며 올라가는 것- 어쩌면 오직 그 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의 생각 외에 또 다른 반대 각의 퍼스펙티브가 있음을 이해하고, 비록 이 세상의 95%는 내가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그 안에서 내가 답이라 믿는 내 생각의 끝을 잡고, 그 것을 한 겹 한 겹 쌓아가며 단단히 완성해갈 때 우리는 비로서 누군가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크리에이터는 모두 시지프스의 후예다”
황량한 산에서 쉼 없이 바위 덩어리를 정상으로 밀어 올리고 허무하게 굴러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시지프스- 더닝 크루거 효과의 그래프 모양새는 마치 시지프스가 묵묵히 오르던 그 계곡을 상상하게 만든다. 클라이언트를 위한 답을 찾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좌절하지만 그 안에서 찾은 한 가닥의 희망을 움켜잡아 키우고, 촘촘하게 꿰어가며 밀고 올라간 크리에이티브는 마침내 정답에 가장 가깝고도 가까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답을 경계하자. 그것은 신의 영역이며, 혹은 확신을 가장한 편견일 수 있다. 그보다는 그 답에 극한의 근사치에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가 무한히 흘리는 생각의 땀방울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자. 그 것만이 우리를 믿는 클라이언트에게 신뢰의 ‘정답’이 될 것이고, 그 것만이 우리 가슴에 새겨진 프로페셔널이란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에.